고구려의 무덤양식과 장례풍습

『三國志 魏志 東夷傳 - 高句麗 (삼국지 위지 동이전-고구려)』

男女已嫁娶, 便稍作送終之衣. 厚葬, 金銀財幣, 盡於送死, 積石爲封, 列種松柏.

남녀가 결혼을 하면, 장례를 위한 수의를 미리 조금씩 만들어 둔다. 장례는 후하게 치르는데, 금은재화를 모두 죽은 이에게 보낸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열지어 심는다.


『後漢書 東夷列傳 - 高句麗 (후한서 동이열전 - 고구려)』

金銀財幣盡於厚葬, 積石為封, 亦種松柏 : 금 은 재물 비단이 다될 때까지 후하게 장사지내고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또한 소나무와 잣나무씨를 뿌렸다.

『南史 列傳 - 高句麗 (남사 열전 고구려편)』

其死葬, 有槨無棺. [六]好厚葬, 金銀財幣盡於送死. 積石為封, 列植松柏. 兄死妻嫂. 其馬皆小, 便登山. 國人尚氣力, 便弓矢刀矛, 有鎧甲, 習戰鬥, 沃沮、東濊皆屬焉.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데 있어서 곽은 있으나 관이 없다. 후이 장사지냄을 좋아하여 금은과 재물과 비단을 모두 죽은 자를 위해 보낸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주위에 심어 놓는다.

『北史 列傳 - 高麗 (북사 열전 - 고(구)려)』

死者,殡在屋内,经三年,择吉日而葬。居父母及夫丧,服皆三年,兄弟三月。初终哭泣,葬则鼓舞作乐以送之.埋讫,取死者生时服玩车马置墓侧,会葬者争取而去.

사람이 죽으면 염하여 집안에 놓는데, 삼년 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옷을 삼년간 입고 형제는 삼개월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며 읍하는데, 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 자를 보내는 것이다. 묻을 때에는 죽은 자가 태어났을 때의 옷과 익숙한 수레 말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 가지고 간다.


『隋書 列傳 - 高麗 (수서 열전 - 고(구)려)』

死者, 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悉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於墓側, 會葬者爭取而去.

죽은 자는 집안에서 염을 하고 삼년 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지아비의 상에는 복을 삼년간 입고 형제는 3개월을 지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슬피 우는데, 장례를 치를 때에 북치고 음악을 하여 춤추며 이를 보낸다.  이에 이르러 시신을 묻는데 모두 죽은 자가 살아있을 때의 옷이나 수레 말 등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지내는데 모였던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 가지고 간다.


『三國志 魏志 東夷傳 - 夫餘 (삼국지 위지 동이전-부여)』

 其死, 夏月皆用冰. 殺人徇葬, 多者百數. 厚葬, 有槨無棺.사람이 죽으면, 여름에는 얼음을 사용하고,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많게는 백명이나 되었다. 장례는 후하게 치르고,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


『後漢書 東夷列傳 - 夫餘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

死則有槨無棺. 殺人殉葬, 多者以百數. 其王葬用玉匣, 漢朝常豫以玉匣付玄菟郡, 王死則迎取以葬焉. 사람이 죽으면 곽은 있어도 관은 없다. 사람을 죽여 순장시키는데 숫자가 많은 자는 백 명이나 되었다. 왕의 장사에는 옥갑을 사용하였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항상 미리 옥갑을 만들어서 현도군에 보내 두었다가 임금이 죽으면 이것을 갖다가 장사 지내게 했다. 

『三國史記 新羅 本紀 - 智證王 (삼국사기 신라본기 - 지증왕)』

 三年, 春三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親祀神宮.

  지증왕 3년 봄 3월, 순장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각 다섯 명씩을 순장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폐지되었다.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三國志 魏志 東夷傳 - 沃沮 (삼국지위지 동이전-<동>옥저)』

其葬作大木槨, 長十餘丈, 開一頭作戶. 新死者皆假埋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置槨中. 擧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 : 장사를 지낼 때는 큰 나무로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십여장이나 되고, 그 윗부분이 출입구를 하나 낸다. 세로 죽은자는 모두 가매장을 하는데, 겨우 형태만 덮은 후 피부와 살이 썩으면 이내 뼈를 취하여 곽 안에 둔다. 집안 모두가 하나의 곽에 공동으로 들어가는데, 나무를 살아있는 형상처럼 깍는다. 죽은 자의 수와 같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 文武王 (삼국사기 신라본기 - 문무왕)』

屬 之後十日, 便於庫門外庭, 依西國之式, 以火燒葬. 服輕重, 自有常科, 喪制度, 務從儉約.

숨을 거둔 열흘 후, 바깥 뜰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불교의 법식으로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 宣德王 (삼국사기 신라본기 - 선덕왕)』

死生有命, 顧復何恨? 死後, 依佛制燒火, 散骨東海.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렸으니 다시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과인이 죽은 후에는 불교의 법식 대로 화장할 것이며, 유골을 동해에 뿌리도록 하라."


『三國史記 新羅本紀 - 元聖王 (삼국사기 신라본기 - 원성왕)』 

冬十二月二十九日, 王薨. 諡曰<元聖>, 以遺命擧柩燒於<奉德寺>南.

겨울 12월 29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원성이라 하고, 유언에 따라 관을 봉덕사 남쪽에 옮겨 화장하였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 廣開土王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 광개토왕)』

二十二年, 冬十月, 王薨. 號爲<廣開土王>.

22년(412년) 겨울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호를 광개토왕이라 하였다.


廣開土太王碑文 (광개토태왕비문)

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광개토태왕은)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시어 39세(서기 412년/영락(永樂) 22년)에 세상을 떠나 나라를 버리시었도다. 이후 갑인년(甲寅年, 서기414년, 長壽王3년)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능을 옮겨 모셨다.


『三國志 魏志 東夷傳 - 弁韓 (삼국지위지 동이전 - 변한)』

以大鳥羽送死, 其意欲使死者飛揚 : 큰 새의 깃털로 장사지내는데, 그 뜻은 죽은 자가 날아 오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三國志 魏志 東夷傳 - 馬韓 (삼국지위지 동이전-마한)』

其葬有槨無棺, 不知乘牛馬, 牛馬盡於送死.

사람이 죽어 장사를 지내는 데에는 관을 쓰지만 곽을 쓰지 않는다. 소나 말을 타고 다닐 줄은 모른다. 그래서 이 소나 말은 모두 사람이 죽어 장사지내는데 쓴다


『周書  傳列 - 百濟 (주서 열전 백제)』

父母及夫死者, 三年治服;余親, 則葬訖除之 :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3년 동안 복을 입는다. 그 나머지 친척들은 장사만 치르면 이내 복을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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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오늘날까지 시기별, 국가별, 지방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흙무덤과 돌무덤이 주류를 이루었다. 흙무덤에는 구덩무덤(토장묘, 土葬墓), 흙무덤(봉토분, 封土墳), 널무덤(토광묘, 土壙墓), 덧널무덤(<토광>목곽묘, 土壙木槨墓) 등이 있고, 돌무덤에는 고인돌무덤(지석묘, 支石墓), 돌무지무덤(적석총, 赤石塚), 돌널무덤(석관묘, 石棺墓), 널받침무덤(석상분, 石箱墳) 등이 있다. 또한 특이한 것으로는 독무덤(옹관묘<항아리무덤>, 甕棺墓) 문화도 있었다.


고구려는 역사상의 다른 고대민족과 더불어 주변국과 유사한 장례습속을 가지고 있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원형이 이어져 오고 있다. 고구려의 무덤 양식에 있어 돌무지무덤(적석묘)과 흙무덤(봉토분)이 보편적이었다.


돌무지무덤은 고구려 민족의 족원을 이루었던 예족(濊族)과 맥족(貊族)의 무덤형태와 관련이 있으며, 규모나 돌을 쌓는 모양과 시기에 따라 대체로 무기단 적석묘(積石墓), 방단적석묘(方壇積石墓), 방단계단식적석묘(方壇階段式積石墓), 방단계단식석실묘(方壇階段式石室墓), 봉석동실묘(封石洞室墓)의 형태로 나뉘는데, 돌무지무덤은 고구려 무덤에 있어 가장 중요한 형태로 대체로 4세기 이전까지 주류를 이루었으며, 특히 하층민들 사이에서는 말기까지 유지되었고 발해까지 지속되었다. 


흙무덤은 봉토석실묘(封土石室墓), 방단봉토석실묘(方壇封土石室墓), 방단계단식봉토석실묘(方壇階段式封土石室墓), 토석혼봉석실묘(土石混封石室墓) 등으로 나뉘며 대체로 3세기 중엽 이후 나타나기 시작하여 후기에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고구려 종합박물관인 고분벽화는 통상적으로 흙무덤에서 발견되고 있다.


초기와 중기의 수도였던 집안지역에서는 12,000여기 그리고 백두산 인근의 백산(白山)지역에서는 2,300여기가 넘는 돌무지무덤이 발견되었다. 특히 집안 지역의 만여기가 넘는 돌무지무덤은 고대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고구려의 장례풍습에 대해 살펴보면 초기의 사회상을 기록한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가 혼인을 하면 수의를 미리 장만하고, 금은재화를 모두 사용하여 후하게 장례를 치르며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덧 붙여서 고구려 후기의 사회상을 기록한 중국의 역사서 『북사』와 『수서』에서는 “죽은 사람은 집안에 빈소를 만들어놓았다가 3년이 지난 뒤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죽었을 때는 모두 3년간 상복을 입고, 형제간에는 석 달을 입는다. 초종을 치를 때는 모두 곡하고 울지만, 장사를 치르고 나면 북을 치고 춤추면서 풍류를 아뢰어서 죽은 이를 보내는 예를 베푼다. 매장이 끝나면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에 입던 옷과 수레와 말을 가져다가 무덤 곁에 갖다 두면 장례에 온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가져간다” 라고 기록하여 죽은 후 곧 무덤을 만들고, 3년 간 상복을 입는 중국인들과 달리 고구려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집안에 빈소를 만들어 놓고 3년을 지낸 다음에 좋은 날을 잡아 장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고구려의 묘에는 죽은 사람의 신분과 경제력의 정도에 따라 금은으로 만든 그릇, 놋쇠그릇(銅器), 쇠그릇, 옥석기(玉石器), 기와, 도기(陶器), 장식품, 생활용구, 생산도구, 쇠사슬, 병기류, 마구류 등의 부장품이 발견되고 있다. 이에 덧 붙여서 장례가 끝나면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 사용하던 물건과 의복 등을 무덤 옆에 놓아 두어서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죽은 사람이 생전에 애용하였던 유품을 무덤 속에 넣어두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죽은 자를 위해 복이 된다고 믿었다.


고구려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실내와 같은 곳에 3년 동안 모신 다음 장지로 옮기는 풍습이 있었다. 상복에 있어서도 부모와 남편의 경우는 3년을 입었지만, 형제간에는 세달을 입었다. 중국의 사서 외에 『삼국사기』와 ‘광개토태왕 비문’에는 고구려 19대 왕인 광개토태왕은 412년에 하늘에서 보낸 수레를 맞아 죽음에 이르렀는데, 3년 뒤인 갑인년(414) 9월 29일 을유(乙酉)일에 산릉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백제에서도 시체를 3년 동안 가묘상태로 둔 뒤 매장을 하는 3년상이 있었다. 이는 주서의 기록과 무령왕릉(武寧王陵) ‘매지권(買地券)’에 보이는 피장자의 사망년월일과 장사일이 3년의 간격을 보이고 있음을 통해서 3년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사서와 함께 3년상에 관한 유적으로는 하활용묘군(下活龍墓群)의 돌무지무덤 중에서 시신을 모시기에는 비교적 적은 묘실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사망 후 3년이 지난 후에 시체를 수습하여 모셨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장례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초상을 치를 때는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하나 장사를 지낼 때는 오히려 풍악을 울리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죽은 사람을 보낸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샤머니즘(Shamanism)을 믿는 북방지역 사람들의 장례풍속으로 고려시대 까지 이어진 풍습이었다. 오늘날 역시 천수(天壽)를 누리다 돌아가신 분에 대하여는 호상(好喪)이라 하여 잔치의 성격을 지니는 경우가 많은데 이와 일맥상통하다고 볼 수 있다.


사서의 기록에는 찾아볼 수 없지만 고구려에서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화장(火葬)의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상으로 우리나라의 화장 제도는 신라 문무왕 때 시작되어 15세기 까지 지속되다 최근에 다시 성행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문화의 유산이었던 화장을 금지하였다. 현대의 중국 역시 법으로 화장만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은 무덤양식에 있어 흙무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인구증가로 인한 도시화와 매장지의 부족으로 인해 주검을 처리하는 방식에 있어 화장풍습이 보편화되어가는 추세에 있다. 사실 산림파괴와 묘지 난으로 인해 전통적인 매장 위주의 장묘문화에서 화장문화로 바뀌고 있는 추세이다. 통계에 의하면 1990년대 우리나라의 화장(火葬) 비율은 15-20%대를 보였으며, 2006년 현재 현재 약 50%를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화장을 한 후 골분을 봉안당(납골당)에 안치 하는데, 이것 역시 일정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묘지난 해소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 들어 화장한 뒤 유골을 산림이나 들판, 추모공원 등의 땅 밑에 묻고 고인과 유족의 이름이 적힌 작은 명패를 세우거나 부착하는 자연장과 화장하여 골분(骨粉)을 나무 밑에 묻는 자연친화적 장묘방식인 수목장에 대한 여론이 조성되어 도입이 임박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화장을 불교식 장묘법이라 하여 선입관을 가졌던 기독교계에서도 ‘국토훼손을 막고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간다’는 취지에서 최근부터 수목장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고 있다.


화장풍습은 예맥족의 풍습과도 연관이 있으며 주검을 불에 태운 후 유골을 곽에 담아 돌을 쌓아 봉한 것이다. 이는 예맥족의 돌무지무덤에 돌로 만든 곽실(槨室)안에 목탄과 불에 그슬린 돌이나 불에 탄 뼈가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화장이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초기 수도였던 환인의 상고성자(上古城子) 고분군의 돌무지무덤에서도 화장의 흔적인 뼈와 뼈가루가 발견되고 있고 집안과 평양에서 고구려 시기의 뼈단지(골호, 骨壺)가 발견되어 화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신라,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 역시 불교가 성행했었으므로 불교의 법식에 따른 화장풍습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은 매장과 화장풍습을 공유했던 것이다.


고구려와 같은 족원을 이루었던 부여에서는 순장의 흔적도 보이는데, 순장은 고대 사회에서 부족장이나 왕이 죽었을 때 따르던 사람들을 함께 매장하여, 죽어서도 생시와 같이 시중들고 생활하도록 하는 신앙적 의미에서 나온 유풍으로, 순장은 왕족을 비롯한 특수계층과 일부 민간차원에서 행하여 졌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도 지증왕 때 이를 금지하였다는 것을 기록으로 보아 순장풍속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리해 본다면 고구려는 돌무지무덤과 흙무덤을 이용하였으며 장례풍습은 대체로 후하게 장례를 치르고 3년상을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적으로는 본다면 불교, 유교, 도교, 샤머니즘 등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알 수 있다.

                                          흙 무 덤

0 흙무덤(봉토분, 封土墳) :무덤 위에 구상(丘狀), 방대형(方臺形) 등의 형태로 흙으로 봉분을 덮은 무덤


0 구덩무덤(토장묘, 土葬墓) : 구덩이를 파고 별도의 시설 없이 시체를 묻은 무덤.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보편적인 매장법으로, 그 구조가 간단하고 시체가 쉽게 썩어 없어지므로 오늘날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0 널무덤(토광묘, 土壙墓) : 선사(先史)시대 때 지하에 구덩이(土壙)를 파고 직접 유해(遺骸)를 안치하는 장법(葬法).


0 덧널무덤(토광목곽묘, 土壙木槨墓) : 무덤 속에 관을 넣어두는 묘실을 나무로 짜 만든 무덤. 일반적으로 움무덤(土壙墓)이라고 부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매장의 주요 구조인 덧널에 의해 덧널무덤이라고 불러 단순한 움무덤인 널무덤이나 낙랑시대의 덧널무덤(木槨墳)과는 구별한다.

                                          돌무덤

0 돌무지무덤(적석총, 赤石塚) : 일정한 구역의 지면에 구덩이를 파거나 구덩이 없이 시체를 놓고 그 위에 돌을 쌓아 묘역을 만든 무덤.

0 고인돌무덤(지석묘, 支石墓) : 선사시대의유물인무덤의한가지. 큰 돌을 두서너개 세우고, 그위에 넓적한 돌을 얹어 놓은 무덤의 형태.

0 돌널무덤 (석관묘, 石棺墓) : 지하에 직사각형의 돌널시설을 만들고 주검 및 부장품을 넣은 청동기시대의 무덤양식.


0 널받침무덤(관대, 棺臺 / 석상, 石床) : 앞트기식돌방(橫穴式石室)이나 벽돌무덤(塼築墓) 내부에 널[棺]을 안치하기 위하여 만든 대(臺).  벽돌이나 돌을 쌓아 만든 것과 한 장의 돌로 만든 것도 있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석상(石床)이라고 한다. 중국 북조시대의 석상은 옆면에 조각을 한 것도 있다.


0 독무덤(옹관묘<항아리무덤>, 甕棺墓) : 크고 작은 항아리 또는 독 두 개를 맞붙여서 관으로 쓰는 무덤양식. 독무덤이라고도 한다. 동아시아에서도 중국, 남만주, 한국, 일본 등지에 널리 퍼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