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구들문화 (Goguryeo and its Gudeul/Ondol Culture)

우리네 어린 시절을 연상해 보면 겨울날 바깥에서 뛰어 놀다가 집으로 돌아와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펼쳐둔 이불속에 들어가 몸을 녹였던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하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 온 가족이 따뜻한 아랫목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이야기 꽃을 피우고 할머니께서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 들으며 정을 나누는 모습이 우리 한민족 생활 문화의 보편적인 단면이라 할 수 있겠다.

리 민족이 거주했던 곳은 동몽골지역, 만주일대의 동북평원과 장백산맥 이남의 산악지역으로 기후 변화가 매우 심한 편이다. 해양보다 비열이 작은 대륙의 영향을 많이 받는 대륙성 기후이며,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살을 에일듯한 혹한의 추위가 계속된다. 이러한 날씨를 견디기 위해 자연스럽게 구들이라는 독창적인 과학적 난방방법을 발명하여 따뜻하게 겨울을 나는 법을 발전시켜왔다. 

1. 구들이란 무엇인가?

먼저 ‘구들’이라는 명칭부터 짚어보자면 구들(온돌<溫突>, Gudeul<Ondol>)이란 순 우리말로 중국측 사료에 나오지 않고, 중국 한자음으로 쓸 수 없는 것과 같이 일본어음으로도 구들이라고 쓸 수 없다.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온돌(溫突)이라고 한자 발음을 사용하였고 중국한자로 구들이라고 쓰거나 발음이 잘 되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일본어로 구들(ぐドル)이라고 발음 할 수 없고 또 쓸 수 없어 온돌(溫突, オンドル)로 기록하여 한국말과 한글 말살 정책으로 원래의 구들이라는 순 우리말이 말살되고 구들이라고 쓰여왔다.


해방 후 구들에 관한 교육을 받은바 없는 일제교육세대가 국제적으로 'Ondol'로 영문 표기하여 현재까지도 학자 및 지식인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들로 잘못 쓰고 있다. 이 영향으로 구들 판, 구들침대, 구들마루, 온수구들, 구들구들 등으로 상품이나 건설공사는 물론 법규조문에 까지 크게 잘못 쓰여지고 있다. 이는 원래의 우수한 구들을 말살하는 바람직하지 아니한 지극히 나쁜 언어 공해임으로 조속히 원래의 제 이름인 구들로 사용함이 마땅하다.


구들은 ‘구운 돌’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구들’이라고 하는 순 우리말로써 오랜 역사속에 명맥을 이어온 우리 민족 고유의 난방문화의 핵심이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화기(火氣)가 방밑의 방고래를 통과하면서 구들(방바닥 밑에 깔린 넓적한 돌)을 달구어 주고 달구어진 구들에서 방출하는 열로 방안에 온기를 오랫동안 보관시켜주고, 굴뚝을 통해 연기가 방출되는 난방법이다. 이는 열의 전도를 이용한 복사 난방 방식의 일종이며, 대류난방을 겸하고 있다. 방바닥을 고루 덮여주기 때문에 습기가 차지 않고 화재에도 안전하다. 우리 민족은 바닥난방 뿐만아니라 취사를 겸하여 거의 모든 열을 고스란히 이용하는연료절감형의 독창적인 난방법을 개발한 유일한 민족이다.


이와 같은 원리로 난방을 하는 곳은 현재 한반도전역, 만주지역과 몽골(蒙古)의 일부인데, 몽골에서는 게르(몽골집, 주거용텐트) 바닥에 이것을 이용한다. 기원전 100년경 로마시대에 하이퍼코스트(Hypocaust)란 구들과 비슷한 난방법이 있었는데,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주로 공중목욕탕의 보온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2. 구들의 기원

그러면 구들은 언제쯤 어디에서 발생한 것일까?


학자들은 구들의 시작이 인류가 불을 발견해서 이용한 불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한다. 원시인은 동굴이나 움막에서 음식을 요리하고 추위를 피하기 위해 모닥불을 피우고 그 주위에 돌을 세워 바람막이를 해 불을 오랫동안 보존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모닥불 주위에 세워 놓은 돌 위에 평평하고 넓은 돌을 얹어, 딱딱하게 얼어버린 짐승의 고기를 녹이거나 구워서 먹기도 하고 그 위에 앉아서 몸을 따뜻하게 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구들의 원시적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한민족의 구들에 대한 내력을 살펴보면,


약 1백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황하 유역의 주구점 두개골 화석 유적에서 바닥에 깔려있는 화원석 등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구석기시대 혹한 지역인 중국 북부나 만주지역에서 유동하던 원시인들에 의해 초기 구들이 개발되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평양시 상원군 흑우리 검은모루 유적에서 29종의 짐승 뼈 화석과 함께 거칠게 깨뜨려서 만든 석기들이 발견되었는데, 연대 측정 결과 약 100만 년 전으로 이 시기부터 구석기인들이 거주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역시 구석기 시대로 추정되는 함북 웅기(雄基) 굴포리 패총 움집에서는 오늘날의 구들과 유사한 난방장치가 발견되었다. 지금부터 5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회령 오동(會寧 五洞)의 구석기시대 주거지 유적에서 구들로 추정되는 형태의 바닥과 벽이 발굴됨으로써 구들의 역사는 원시적이나마 적어도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공적인 주거는 대체로 기원전 5,000년 경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기에는 땅을 파서 움을 만들고 나무로 지붕틀을 짜서 덮은 구조였지만 점차 주상 주거로 발전한다. 움집에서는 움의 내부에 화덕 자리를 두어 난방을 했지만 주상 주거로 발전하자 당연히 난방 방식도 달라졌을 것이다.


영변군 세죽리, 시중군 노남리, 요령성 무순시(撫順市) 연화보 유적 등에서 (고)조선 시기의 구들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세죽리 5개의 집터 중 2개의 집터에서 발굴된 구들은 ‘ᄀ’자형 외고래 구들이었다. 구들 고래는 납작하고 길쭉한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얇은 판돌을 덮어 만든 것이다. 고래의 맨 앞부분에는 고래보다 깊은 아궁이가 있으며, 구들 고래의 길이는 3~4미터였다. 특히 세죽리 구들유적은 우리나라 구들의 시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구들은 문헌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한반도와 만주지역 지배)의 선조들이 추위와 싸우면서 원시적인 형태의 구들을 개량, 발전시켜나가기 시작했을 것이며, 삼국시대 이전에 이 지역에 거주하던 부여족 계통의 동이족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구들의 시원은 이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추정이다.


『수경주(水經注) - 북위(北魏)의 지리학자 역도원(469~527) 저술』

观鸡山 谓之观鸡水水東有觀雞寺, 寺內起大堂, 甚高廣, 可容千僧, 下悉結石為之, 上加塗塈, 基內疏通, 枝經脈散, 基側室外, 四出爨火, 炎勢內流, 一堂盡溫. 蓋以此土塞嚴, 霜氣肅猛, 出家沙門, 率皆貧薄, 施主慮闕道業, 故崇斯構, 是以志道者多栖託焉 : 관계산에는 관계수라 일컫는 하천이 흐르고 그 동쪽에 관계사라는 절이 있다. 사내에는 대법당이 있는데 높고 넓어 많은 승려들을 수용할 수 있다.  (방바닥) 밑에 여러 가닥으로 돌을 괴고, 그 위로 진흙을 덧발라 내부로는 열이 여러 갈래로 흘러 들어가게 하고 부뚜막에서 달구어진 열기는 구들 내부로 강하게 흘러들어 방바닥을 따뜻하게 하고 그 열기는 내부에서 완전히 연소하고 연소된 열은 외부로 방출된다. 


수경주(水經注)에 나타난 관계사(觀鷄寺)의 구들이 동이족(東夷族)의 고지(古地)로 여겨지는 즉 지금의 북경 동남방인 현풍윤(現豊潤)의 동쪽이 관계사(觀鷄寺)에 해당한다고 손진태(孫晋泰) 교수는 주장한다.


구들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역도원(469~527)이라는 북위(北魏, 386~534)의 지리학자가 저술했던 옛 지리서인 ‘수경주(500~513)’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는 ‘방바닥 밑에 여러 가닥으로 돌을 괴고, 위에 진흙을 발라서, 불을 피워 여러 갈래로 열이 흘러 들어가게 해 방바닥을 따뜻하게 한다’라고 하여 중원에는 없었던 신기한 난방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전문용어 없이 ‘여러 가닥의 돌’로 구들을 표현했다.


수경주의 기록만으로 구들의 중국기원설, 산서성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나 논리가 빈약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중국과는 다른 민족이 중국 북부 지역에 살고 있었으며, 구들에 대한 언급은 이 지역의 관계사(觀鷄寺)라는 절 특유의 것임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옛 (고)조선의 구들문화를 이어받았거나 아니면 당시 고구려의 구들문화를 도입하여 그 절에서만 사용했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다. 

구들의 기원에 대한  여러 설을 살펴보면,

산서성 기원설 (중국 서북부 산서성에서 만주로, 만주에서 다시 한반도로 전파), 만주기원설(만주에서 기원하여 한반도로 전파), 부여기원설(부여족이 창시하여 그 후예인 고구려로 전파), 동이족기원설, 고구려기원설 등이 거론되고 있는 현실이다.

구들에 대한 문헌적 기록이 빈약한 반면 유적은 한반도와 만주지역 그리고 몽골지역에서 발견되고 있고, 고조선 이래로 부여, 고구려, 말갈, 발해, 여진, 만주족 등이 이 지역에서 거주해 오면서 구들을 이용했었다. 그리고 중국의 한족이 만주지역을 본격적으로 차지하기 시작한 1950년대까지 우리 민족의 문화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한민족이나 한민족과 관련된 민족이 개발, 발전시켜 왔다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지금도 만주의 한국동포(조선족)들은 한족과 달리 구들생활을 하고 김치를 담아 먹으며 한족과는 다른 문화생활을 하고 있다.

3. 고구려의 구들문화

고구려가 위치했던 지역은 광활한 만주지역과 한반도의 산악지대로 혹독한 추위와 척박한 환경적인 여건에 따라 고조선과 부여의 유산인 구들을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며, 또한 여러 북방민족을 정복하고 복속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구들문화를 형성 발전시키게 되었을 것이다.


『구당서(舊唐書) 열전(列傳) 고려(高麗)』

  冬月皆作長坑, 下燃; 火以取暖 : 고(구)려인들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불을 지펴 방을   데웠다.


『신당서(新唐書) 열전(列傳) 고려(高麗)』

  民盛冬作長坑, 溫火以取暖 : 고(구)려인들은 겨울에 구덩이를 길게 파서 불을 지펴 방을 데웠다.


고구려인들의 구들 사용에 대한 기록은 구당서와 신당서에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한국학계에서는 구들의 기원을 고구려로 언급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이는 문헌적 고찰에만 의한 것이라 판단되며, 이전부터 원시적인 형태의 구들을 점차 발전시켜 청동기(고조선) 시대부터 그 구조법이 시험되어 왔으며, 고구려 시기에 부여를 비롯한 북방계 민족이 구들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삼국시대와 발해와 고려를 거치면서 좀 더 발전된 형태로 우리나라 전역에 퍼져나간 난방방식으로 굳어지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 왕궁인 경복궁에서는 아직까지도 온돌유적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일반인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중국의 왕세련(王世蓮)과 같은 학자는 중국측의 역사인식으로 고구려의 구들(長坑)과 여진의 구들(火坑)을 비교하는 것은 여진은 고구려계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長坑’에만 의거 구들문화의 기원을 고구려로 볼 수는 없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중요한 것은 수천년 동안 구들을 최상의 난방방식으로 인식하고 오늘날 일반적인 주거형태인 아파트에도 구들을 이용한 난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민족이나 혹은 한민족과 관련된 민족만이 구들을 이용, 발전시켜 왔다는 데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인이 기록한 역사서에 장갱(長坑, 긴 구덩이-구당서 및 신당서),  화갱(火坑, 불구덩이-송(宋)나라 서긍(徐兢)의 고려도경), 캉 및 갱(坑, 삼조북맹회편)이라 기술하고 있어 중국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전문적인 용어없이 그냥 긴 구덩이 혹은 불구덩이 등으로 기술하고 있어,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 것이며 한민족의 문화산물임을 보여주는 문헌적 증거라 하겠다.

 

 


진서 사이전(晋書 四夷傳)에서도 구들은 한반도 북부 압록강, 두만강 유역과 만주 지역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수경주의 기록은 구당서보다 100년이나 앞선 것이나 수경주는 북위의 기록이며 북위는 중국의 역사로 되어있지만 실은 내몽골, 하북성, 산서성 일대를 아우르던 유목민족인 선비족의 중원에 대한 지배의 역사, 이민족의 역사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중국의 역사는 아니다. 지리적으로도 선비족은 고조선이나 고구려와 접촉이 잦은 위치에 있었다. 더구나 수경주의 기록은 구들에 대한 발견이지 중국 한족에 의한 구들의 발상에 대한 기록은 아니며 참고로 중국의 한족들은 구들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의 중국에서는 우리와는 달리 공열식(라디에이터) 난방을 하며 추운 겨울에도 옷을 껴입는 것으로 겨울을 나는데, 최근 들어 한국에서 개발한 구들난방이 채택된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으며, 한국의 업체들은 구들 관련제품(구들판넬, 보일러)등을 중국에 수출하고 있다. 구들을 도입한 일부 중국인들은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게 되었고, 구들을 개발한 한국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또 다른 한류문화의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집안 동대자 유적 평면도에 나타난 구들구조 (A.D. 4C 중엽)

 

동서 35m, 남북 15m의 장방형으로 평면에 동서로 2개의 방이 있다. 각기 동벽 중간에서 시작하여 벽을 따라 북향하다가 북벽을 따라 ‘ᄀ’자로 꺾여 연장되고, 이것이 다시 북쪽으로 꺾여 집 밖의 굴뚝과 연결된 구들 시설이 있었다. 쌍줄고래를 형성 한 구들도 있고, 또 시대를 달리하는 3줄 고래도 일부 발굴되었다.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단지 고구려에 구들이라는 것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유적을 통해서 본 고구려의 구들은 대체로 쪽구들(외고래 구들)임을 알 수 있다. 초기의 구들은 자강도 증강군 토성리 유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유적의 제4구에서는 4개의 구들이 발견되었는데, 구조는 납작한 강돌을 두 줄로 세워놓고 그 밑을 진흙으로 다져 만든 외고래 구들이다. 구들 고래의 넓이는 20센티미터, 높이는 20~25센티미터이다. 구들 고래는 남북으로 3.6미터로 놓였고 남쪽에서 서쪽으로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다. 고구려의 첫 도성이었던 오녀산성의 건물지와 병영터에서도 쪽구들을 놓아 군사들이 구들생활을 하며 휴식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건물지(高句麗 建物址)로는 집안의 동대자(東臺子) 건물지와 왕궁지로 비정되는 이수원자남(梨樹園子南) 건물지가 있고, 이외에도 압록강 유역의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魯南里)에서 집자리가 조사되었다. 고구려 후기 동대자 유적에서는 방구들 골의 높이 20~25cm의 얕은 연기통로가 있고, 구들골의 폭이 2m여서 그 위에서 사람들이 생활했음을 보여 준다. 회랑으로 연결된 4개의 건물지가 발굴되었는데 건물은 ‘ᄀ’자상으로 굽은 구들구조를 가졌고 회랑에는 잔돌을 깔았다. 이수원자남 건물지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유적의 서쪽에서 4개의 화강암 초석이 있고, 동대자 건물지에서 출토된 것과 동형의 붉은색 기와편이 흩어져 있어 건물지였음을 알 수 있다. 노남리의 집자리에서도 ‘ᄀ’자로 굽은 구들구조가 방 2개에서 발굴되었으며, 평남 북창군 대평리 유적에서는 두줄 겹 고래가 혼용된 구들이 발굴되었다. 평양시 역포구역(力浦區域) 동명왕릉 곁에 있는 발굴된 정능사 승방지 유적 중심구역 서쪽의 2구역, 4구역과 맨 동쪽의 5구역 집터들에 있는 외고래의 구들과 기와조각들로 쌓아 만든 굴뚝개자리들은 고구려의 독특한 구들시설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구들구조는 고구려 사람들이 구들로 난방을 한 가옥에서 살았음을 보여준다.


안악 3호분 벽화에는 한 여인이 부뚜막에 시루를 올려놓고 음식을 만들고 있고, 다른 여인은 부뚜막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그림이 보인다. 아궁이에서 지핀 불길이 긴 고래 구들을 따라 굴뚝으로 빠지고 있다.


구리의 아차산 제4보루성 유적에서도 12개의 부분난방의 흔적이 보이는 ‘쪽구들’ 유적이 발견되었다. 굴뚝을 빼고는 화로와 아궁이도 실내에 배치했다. 이로 미루어 고구려인들은 겨울철 잠잘 때만 추위에 견디기 위해 쪽구들 위에서 생활하고, 여름철이나 일상생활 때는 평상이나 좌상에서 생활하는 반(半) 입식문화를 영위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원조로 알려진 쪽구들 문화는 고구려인들이 불과 돌을 활용하여 추운 곳에서 잘 적응했으며, 오늘날의 좌식문화로 대변되는 방 전체를 데우는 구들이 아닌 아차산성 쪽구들에서 볼 수 있듯이 각종 정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즉각 출격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반입식 문화를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군대 내무반의 침상구조 역시 반입식 구조로 되어있다. 

 

『수서 열전 - 고(구)려 (隋書 列傳 - 高麗)』

  俗好蹲踞 : 풍속에 걸터 앉는 것을 좋아한다.

 

단순히 벽화로만 고구려 전체의 문화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무용총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귀족들의 생활 역시 의자에 앉아 생활했던 것으로 미루어 입식문화를 영위했음을 알 수 있지만, 일반 평민들은 움집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보아 입식이 아닌 좌식문화를 영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고구려의 이러한 구들문화는 서역과 몽골, 그리고 왜(倭)까지 고구려의 생활방식이 전해졌다. 고구려 멸망 후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흥망하였던 발해(渤海)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제4궁전터에서 발견된 구들유적은 고구려의 구들문화를 발해가 그대로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연해주 지역의 노보고르데예프카, 스타로렌첸카, 코르사코프카, 콘스탄티노프카, 아나니예프까, 불로치카의 발해 유적에서도 모두 구들이 발굴되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상경용천부 제4궁전터의 구들 전체가 아닌 굴뚝 시설만 복원하여 한민족의 구들문화를 교묘히 은폐하여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임을 공공연히 과시하려는 속셈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하여 구들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한민족의 겨울을 따뜻하게 해준 독창적인 발명품이다.

경기도 양주 회암사지 (구들 터)

 

1328년 고려 충숙왕 때 창건된 이 절은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며 우리나라 최대의 구들시설이 발굴되었다


1950년대 전쟁이 끝난 후 경제개발과 현대화로 인해 연탄 아궁이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재래식 구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수 천년 간 이어져온 흙과 나무를 이용한 건축법 대신 인구증가와 도시화에 따라 시멘트, 콘크리트 건축술이 널리 보급되어
연탄난방과 기름난방, 가스난방보일러에 의한 난방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난방법 역시 아궁이는 보일러로 바뀌고 구들대신 방바닥에 파이프를 구들의 형태로 골고루 깔고 난방수를 순환시키는 방식으로 구들과 동일한 난방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구들은 일본으로 전파되었으며 지금은 중국과 유럽으로도 전파되고 있다.

4. 구들의 구조와 종류

구들의 채난원리(採暖原理)는 열의 전도를 이용한 것인데, 아궁이, 불길이 지나가는 통로인 고래(방고래), 개자리, 연도(煙道), 굴뚝의 각 부분으로 구성


◎아궁이  : 방고래에 불을 넣거나 솥 또는 가마에 불을 지피기 위해 만든 구멍.

◎고래 : 방 구들장 밑으로 낸 고랑. 불길과 연기가 통하여 나가게 되어 있음.

◎구들장 : 방고래 위에 깔아 방바닥을 만드는 얇고 넓은 돌. 구들돌.

◎개자리 : 불기를 빨아 들이고, 연기를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방구들 웃목 속에 깊게 파 놓은 고랑.

◎연도(煙道) : 연기가 굴뚝에 이르러 나가기까지의 통로.

◎굴뚝 : 아궁이나 화실(火室)에 들어오는 바람을 막거나, 연소된 물질을 외부로 내보내는 불연성(不燃性)의 연결체.


 

5. 구들의 과학성

구들은 한국의 독특한 난방법으로 열의 효율이 좋고 연료나 시설이 경제적이며, 고장이 별로 없을 뿐 아니라 구조체에 빈번한 손질이 필요하지 않다는 등의 장점이 있다. 가열시간이 길고 온도조절이 어렵다는 등 단점도 있으나 우리 민족은 수천년간의 경험으로 화략을 조절하는 등 이러한 단점을 극복해 왔다.


구들이 오랫동안 온기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구들장의 재료인 돌의 선정이다. 우리 선조들은 주위의 여러 돌 중에서 운모(雲母, mica)를 골랐다. 특히 백운모(白雲母 , muscovite)는 열이나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 절연체다. 절연체인 백운모 구들장은 아래의 뜨거운 열기를 한꺼번에 방 안으로 내뱉지 않게 해준다. 또한 구들장은 아랫목과 윗목의 두께가 다르다. 이는 아랫목의 경우 불을 지피는 아궁이와 가깝기 때문에 너무 뜨거워질 수 있어 두꺼운 돌을 쓰고 여기에 진흙도 두껍게 바른다. 이 때문에 아랫목의 구들장은 많은 양의 열을 저장할 수 있다. 한편 윗목의 구들장은 얇게 해 빨리 가열되도록 했다. 아랫목과 윗목의 온도차를 가능한 한 줄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구들난방에서는 바닥 면과 천장 면을 제외하면 실내 상하 온도차가 거의 없는 균등한 실온이 형성된다. 또한 구들은 발바닥을 포함한 신체가 직접 구들에 접촉하므로 쾌감을 얻는 동시에 혈액 순환을 촉진시키므로 과학적이고도 이상적인 난방 방식으로 구들은 과학적인 지식의 산물이다.


구들은 취사와 난방을 겸용하여 부족한 자원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도록 한 효과적인 연료절감형 난방방식으로, 방바닥을 골고루 덥게 해주고 습기가 차지 않도록 하여 기거하기에 적합하도록 하며 화재에도 안전하다. 이러한 에너지 효율적인 면도 고려하여 이중 효과를 얻도록 한 것이야말로 선인들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6. 외국의 시각에서 본 구들(온돌)

한국의 아파트의 난방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프랑스의 웹사이트
Enfin, le systeme traditionnel de chauffage par le sol caracteristique de l'habitat coreen, ondol, se retrouve dans les appartements sous une forme similaire, le foyer de la cuisine, source de chaleur, etant remplace par un chauffe-eau individuel ou central. Plus generalement et dans la plupart des cas, les habitants continuent de dormir et de s'asseoir par terre. Ce sont donc des caracteristiques tant spatiales que techniques qui sont assimilees, puis reintroduites sous une nouvelle forme dans les appartements; reflet de la perennite d'un certain mode de vie (relation au sol, notamment).
(source : http://sources.asie.free.fr/espace/culture/inalco-cnrs/habitat/MHFabre.html.sav)


(미국의 외교관이자 의사인 알렌의 『조선견문기』)

농부나 일꾼들이 사는 집이 아무리 누추하다 하더라도 항상 깔끔한 작은 침실이 딸려 있는데, 진한 갈색의 유지가 발라져 있는 구들과 시멘트로 된 방바닥은 하루에 두 번씩 밥을 하느라고 때는 불 때문에 항상 따뜻하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이들은 이웃 나라 사람들보다 더 편하게 산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본의 집들은 춥기로 유명하고, 유일한 난방 시스템은 손가락을 따뜻하게 하는데 사용되는 화로가 전부이며, 또 중국의 집들은 아주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한가지 난방 시스템은 북쪽 지방에서 사용되는 식으로 불에 달군 돌 이외에는 집을 따뜻하게 하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중부의 가옥들은 매우 추울 경우에도 집이 전혀 따뜻하지 않아 사람들은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그저 옷을 더 껴입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영국인 여행가인 헨리 노먼은 조선을 여행하는 동안 놀랍고 아름다운 이 나라를 매우 칭찬하였으며, 베이징을 방문한 후에 조선의 수도인 서울은 베이징과 비교하면 천국이라고 쓰곤 했다.


(독일 기자 지그프리드 겐테의 『한국견문록』, 1901)

주민들이 장작 등 땔감을 아궁이에 집어 넣으며 불을 피우는 몸에 밴 능숙한 솜씨를 보면 감탄하게 된다. 추운 겨울철에 따뜻한 방에서 아늑하게 몸을 녹일 수 있는 이처럼 뛰어난 난방 기술을 지닌 민족은 동아시아 전역을 통틀어서 한국인밖에 없다. 중국인들은 실내의 벽 한 구석에 연통 난로를 두고 자면서 짚으로 불을 때기 때문에 화재가 발생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일본인들은 대체로 한국이나 중국 같은 난방법을 모르고 산다. 그저 방안에 작은 화로를 놓고 차가운 손을 덥히는 정도이며 난방까지는 되지 않는 매우 소극적인 난방법이다. 따라서 추운 겨울에 뜨끈하고 훈훈한 온돌방에서 보낼 수 있는 한국인들은 그들의 우수한 난방 기술에 긍지를 가지고 자랑할 만하다.


(이탈리아 총영사 까를르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 1904)

한국의 가옥들은 한결같이 나즈막한 단층이며 2층으로 된 서민의 집은 찾아볼 수 없다. 한국 가옥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동양에서 오로지 그들만이 고안해 낸 온돌이라는 난방장치를 사용한다는 점인데, 실제로 아주 훌륭하고 독창적인 것이다. 한국의 집은 땅을 파고 기초 공사를 하는 게 아니라 지면 위에 그냥 짓기 때문에 방바닥이 지면보다 약간 높아 온돌이라고 부르는 공간 사이에 나무나 짚 등을 때어 바닥을 덥히면 방안 전체가 훈훈해진다.


(프랑스 여행가 듀크로끄)

한국인들은 거의가 초가집에서 살고 있으며 기와집은 200호 중 한 집이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물다. 이러한 한국인들이 서양보다도 먼저 난방 장치를 활용해 왔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방바닥 밑으로 연결된 통로를 통해 더운 연기가 지나면서 충분한 열기를 만들어 내는데 설치 방법도 간단하다. 이렇게 기막힌 난방법을 세계 속에 널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

아궁이 밑에서 때는 불의 열기와 연기가 구들장 사이를 지지면서 방바닥을 덥힌다. 이러한 난방은 겨울철에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따뜻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에 연료가 부족한 지역에서는 확실히 권할 만하다. 사용하는 땔감도 나뭇가지나 통나무 등 저렴한 것이며, 이마저도 없다면 잡초, 나뭇잎 등 어느 것이라도 땔감으로 활용된다. 이 때문에 한국의 서민들은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 사람들보다 따뜻한 집에서 살고 있다.


출처:  http://www.tao-healing.com/dailyb.htm, http://www.guno.pe.kr/05korean/korean1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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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s Korean heating system, ondol, uses a system of pipes that transport hot water underneath each room in a house. Most Korean families prefer this kind of heating system because the warmth generated upwards from below the floor not only heats every room during cold winters, but also symbolizes the coziness and camaraderie within the family. A Korean home lacking ondol means the warmth is missing in that family.

When Western forms of heating, such as air conditioners blowing hot air, became more widely used in Korea, many families missed the ondol system that has been an integral part of the Korean home since the Three Kingdoms period. As a result, developers in Korea during the 1990’s began to discard Western forms of heating, and started to incorporate ondol in new housing developments. Even the most modern Korean hotels offer guests the option of selecting a traditional ondol room with no beds. You and your spouse, or significant other, gets to sleep on the warm floor.

However in the past, Korean homes used a different form of ondol. This prior system, which was first used in Koguryo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due to the cold climate, had a network of underground flues that transported heat from the kitchen to each room. These flues were covered by thin, flat stones. The stones were then covered with yellow earth, and the floor was leveled. To top it off, layers of paper sheets were pasted on the floor.

This process was efficient since the heat and smoke generated during cooking would be transported automatically to each room in the house. Usually the kitchen would be built at a lower level, and the heated rooms would be in an elevated position to allow the flues to run underneath.

Many people may think that the heat will be quickly lost within a couple hours after cooking. In fact the floors will retain their warmth, ranging from more than 30 days to three months depending on the design of the flue structure, with just one heating.

If someone decides to teach English in Korea, most likely they will be placed in an apartment with modern ondol (the one with hot water pipes) rather than Western air conditioners blowing hot air.

For anyone accustomed to eating dinner while seated on the floor, sleeping on the floor, or engaging in some intimate activity on the floor, ondol is the logical choice.

http://www.dawnbeach.co.kr/english/images/room/ondol.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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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on19th June 2005, 11:06 AM
The Romans used to heat their houses in this manner too. Why it fell out of favour in Europe is a mystery to me: underfloor heating is both efficient and comfortable, and given the choice I'd prefer it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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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chao 22nd June 2005, 02:38 AM
There was one danger with the old ondol system. If the flues under the floors were damaged, and the floor had cracks, carbon monoxide will enter the room if the heat was fueled by yontan (charcoal briquettes). This has happened before.

So it was very important for the old ondol to be well-designed to ensure safety and comfort.

Nowadays, most Korean homes use hot water ondol, which is a lot sa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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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n_Lee10th August 2005, 04:59 AM
Once I stayed in an apartment in Seoul for a while. I found there was a thermostat on the wall and I didn't find any heater. Later I was told that it was used to control the temperature of the hot water running in the ondol.

But in Jilin where many ethnic Koreans live, the ondol tradition seems to have lost. Once I was treated to a Korean village in winter time, we just sat on the bed (with the brick stove underneath) and ate on the bed.

(Source : http://www.chinese-forums.com/archive/index.php/t-5146.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