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음악 (Music)

『수서 열전 - 고(구)려 (隋書 列傳 - 高麗)』

   樂有五弦琴, 箏, 篳篥, 橫吹, 簫, 鼓之屬, 吹蘆以和曲 : 악기에는 오현, 금, 쟁, 필률, 횡취, 소, 북이 있고    갈대를 불어서  곡조를 맞추었다.

『수서 지 음악 하 - 隋書卷十五 志第十 音樂 下』
   
始開皇初定令, 置《七部樂》:一曰《國伎》, 二曰《清商伎》, 三曰《高麗伎》, 四曰《天竺伎》, 五曰
  《安國伎》, 六曰《龜茲伎》, 七曰《文康伎》. 又雜有疏勒, 扶南, 康國, 百濟, 突厥, 新羅, 倭國等伎.

   시황초 영을 정하여 칠부악을 두었다. 첫째가 국기, 둘째가 청상기, 셋째가 고(구)려기, 넷째가 천축기,    다섯째가 안국기,  여섯째가 구자기, 일곱 번째가 문강기이다. 또한 잡기에 속하였던 것은 소륵(신강
   카쉬카르)기,
부남(캄보디아)기,   강국(사마르칸트)기, 백제, 돌궐, 신라기 등이 있다.


『수서 지 음악 하 - 隋書卷十五 志第十 音樂 下』

  《高丽》, 歌曲有《芝栖》, 舞曲有《歌芝栖》. 乐器有弹筝, 卧箜篌, 竖箜篌, 琵琶, 五弦, 笛, 笙, 箫, 小筚     篥, 桃皮筚篥, 腰鼓, 齐鼓, 担鼓, 贝等十四种, 为一部. 工十八人.

    고(구)려의 가곡으로는 지서가(芝栖歌), 춤곡으로는 가지서무(歌芝栖舞)가 있다. 고구려 악기로는
    탄쟁, 와공후, 수공후,  비파, 오현, 적, 생, 소, 소필률, 도피필률, 요고, 제고, 담고, 패 등 14가지가
    있으며, 18명의 악공이 연주한다.


『日本書紀 - 卷十四雄略天皇八年 - 『일본서기』권 제14 웅략 8년(464년/462년)

   高麗王卽發軍兵.屯聚筑足流城.〈或本云.都久斯岐城.〉遂歌舞興樂.於是.新羅王夜聞高麗軍四面歌.知賊    盡入新羅地.

   웅략 8년(462) 고(구)려왕이 곧 군사를 일으켜 축족류성(筑足流城, 어떤 책에서는 도구사기성(都久斯     岐城)이라고 한다)에 모여 진을 치고서 드디어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가무흥락). 신라왕     은 밤에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듣고 적군이 모두 신라 땅에 들어왔음을 알았     다.


『日本書紀 - 卷二九天武天皇十二年 - 『일본서기』권 제29 천무천황 12년(684년)

   是日.秦小墾田.及高麗.百濟.新羅三國樂於庭中 : 천무 12년(684) 같은 날 소간전무(小墾田舞)와 고(구)    려, 백제, 신라 3국의 무악(舞樂)을 조정에서 연주하였다.


『삼국사기 잡지 - 악, 三國史記 雜誌 - 樂>』

   玄琴之作也. <新羅>古記云: "初, 晋人以七絃琴, 送<高句麗>. <麗>人雖知其爲樂器, 而不知其聲音及鼓之    之法, 購國人能識其音而鼓之者, 厚賞. 時, 第二相<王山岳>, 存其本樣, 頗改易其法制而造之, 兼製一百餘     曲, 以奏之. 於時, 玄鶴來舞, 遂名玄鶴琴, 後但云玄琴."  : 현금의 제작과 관련하여 신라 고기에는 "처음     에 진(晋, 266-420)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냈다. 고구려 사람들이 비록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알았으나 그 음률과 연주법을 알지 못하여 나라 사람들 중에 그 음률을 알아서 연주할 수 있는 자를 구     하여 후한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 때 제2국상인 왕산악이 칠현금의 원형태를 그대로    두고, 만드는     방법을 약간 개조하여 동시에 1백여 곡을 지어 그것을 연주하였다. 이 때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     으므로 마침내 현학금(玄鶴琴)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그 뒤로는 다만 현금이라고 하였다"고 기록되     어 있다.


   <高句麗>樂, 『通典』云: "樂工人紫羅帽,飾以鳥羽,黃大袖,紫羅帶,大口蔥,赤皮, 五色縚繩.舞     者四人,椎髻於後,以絳抹額,飾以金璫.二人黃裙襦,赤黃蔥;二人赤黃裙, 襦蔥.極長其袖,
    烏皮,雙雙併立而舞.樂用彈箏一,
箏一,臥箜篌一,豎(竖)箜篌一,琵琶一,五絃琵琶一,義笛      一,笙一,橫笛一,簫一,小篳篥一,大篳篥一,桃皮篳篥一,腰鼓一,齊 鼓一,擔鼓一,貝一.大唐      武太后時尚二十五曲,今唯能習一曲,衣服亦寖衰敗,失其本風." 『冊府元龜』云 : "樂有: 五絃琴, 箏,      禑?, 橫吹, 簫, 鼓之屬, 吹蘆以和曲."  : 고구려 음악에 대해서는 『통전』에 "악공들은 자색 비단 모자
     에 새 깃을 장식하고, 노란색의 큰 소매옷에 자색 비단 띠를 띠었으며, 통이 넓은 바지에 붉은 가죽신      을 신고, 오색 물을 들인 끈으로 장식하였다. 춤추는 자는 네 명인데, 복상투를 뒤에 늘이고, 붉은 수      건을 이마에 매고, 금고리로 장식하였다.    두 명은 노란색 치마 저고리에 적황색 바지를 입고, 두 명      은 적황색 치마 저고리에 바지를 입었는데, 소매를 매우 길게 하였으며, 검은 가죽신을 신고, 두 명씩      나란히 서서 춤을 춘다. 악기로는 탄쟁 하나, 추쟁 하나, 와공후 하나, 수공후 하나, 비파 하나, 오현금      하나, 의취적 하나, 생 하나, 횡적 하나, 퉁소 하나, 소필률 하나, 대필률 하나, 도피필률 하나, 요고 하      나, 제고 하나, 담고 하나, 패 하나를 사용하였다. 당 무태후 때도 25곡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 곡만을      익힐 수 있고, 의상마저 점점 낡고 없어져서 그 원래 풍습을 상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책부원      구』에는 "악기에 오현금, 쟁, 피리, 횡적, 퉁소, 북 등이 있고 갈대를 불어서 곡조를 맞추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통전-通典 卷第一百四十四

  凡大燕會,設十部之伎於庭,以備華夷:一曰燕樂伎,有景雲之舞,慶善樂之舞,破陣樂之舞,承天樂之   舞;二曰清樂伎; 三曰西涼伎;四曰天竺伎;五曰高麗伎;六曰龜茲伎;七曰安國伎;八曰疏勒伎;九   曰高昌伎;十曰康國伎. 其十部所用工人. 樂器,在清樂及四方樂篇中. 每先奏 樂三日,太樂令宿設懸於   庭.其日,率工人入居次.協律郎舉麾,樂作;仆麾,樂止.    文舞退,武舞進 .


통전-通典卷第一百四十六

   讌樂,武德初,未暇改作,每讌享,因隋舊制,奏九部樂. 一讌樂,二清商,三西涼,四扶南,五高麗,    六龜茲,七安國,八疏勒,九康國.


통전-通典卷第一百四十六

   東夷二國.高麗.百濟.高麗樂,工人紫羅帽,飾以鳥羽,黃大袖,紫羅帶,大口蔥,赤皮, 五色縚繩.舞    者四人,椎髻於後,以絳抹額,飾以金璫. 二人黃裙襦,赤黃蔥;二人赤黃裙, 襦蔥.極長其袖,烏皮,    雙雙併立而舞.樂用彈箏一,搊箏一,臥箜篌一,豎(竖)箜篌一,琵琶一,五絃琵琶一,義觜笛一,笙    一,橫笛一,簫一,小篳篥一,大篳篥一,桃皮篳篥一,腰鼓一,齊 鼓一,擔鼓一,貝一. 大唐武太后    時尚二十五曲,今唯能習一曲,衣服亦寖衰敗,失其本風.百濟樂,中宗之代,工人死散. 開元中,岐王    範為太常卿,復奏置之,是以音伎多闕. 舞者二人,紫大袖裙襦,章甫冠,皮履.樂之存者,箏, 笛, 桃皮    篳篥, 箜篌, 歌 .


고려사악지 삼국속악조 - 고구려악 : 高麗史71卷-志25-樂2-三國俗樂-高勾麗』

   1. 來遠城 : 來遠城在靜州卽水中之地. 狄人來投置之於此名其城曰來遠歌以紀之.

   2. 延陽[延山府] : 延陽有爲人所收用者以死自效比之於木曰: "木之資火必有 賊之禍. 然深以收用爲幸雖至於灰燼所不辭也."

   3. 溟州 : 世傳書生遊學至溟州見一良家女美姿色頗知書. 生每以詩桃之女曰: "婦人不妄從人待生擢第父母有命則事可諧矣." 生卽歸京師習擧業.女家將納壻女平日臨池養魚魚聞警咳聲必來就食女食魚謂曰: "吾養汝久宜知我意." 將帛書投之有一大魚跳躍含書悠然而逝. 生在京師一日爲父母具饌市魚而歸剝之得帛書驚異卽持帛書及父書徑詣女家壻已及門矣. 生以書示女家遂歌此曲. 父母異之曰: "此精誠所感非人力所能爲也." 遣其壻而納生焉.

    고려사 악지 삼국속악조에는 고구려악으로 내원성(來遠城), 연양(延陽), 명주(溟州)의 3종만 기재되어     있으나 당시 중원을 풍미하던 서역악(西域樂) 즉 악기 뿐 만 아니라 탈춤까지 섭취한 것으로 보인다.


수서 열전 - 고(구)려 <隨書 列傳 高麗>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 장례 의식에서 북치고 음악을 하여 춤추며 이를 보낸다.


『북사 열전 - 고려 (北史 列傳 - 高麗)』

   初终哭泣,葬则鼓舞作乐以送之 : 장례 의식에서 북치고 음악을 하여 춤추며 이를 보낸다.


이백의 시 - 李白 集校注 卷6 樂府 - 高句麗 >』

    金花折风帽, 白马小迟回, 翩翩舞广袖, 似鸟海东来

    금꽃을 꽂은 절풍모 / 백마를 타고 가다 멈칫 돌아보니/넓은 소매 너풀너풀 춤을 추고/동쪽바다로부터     날아온 새같네

  

신당서 열전 - 新唐書 列傳 第三十四

   翦穀綴巾上, 反披紫袍, 爲高麗舞, 舉動合節, 滿坐鄙笑  : 장식을 한 목도리에 역으로 갈래진 자주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춤을 추는데 고려무라 한다. 동작이 절제있고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모두 즐거이
   웃고 있다.

 

고구려는 지리적으로 중원의 국가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주변의 여러 부족과 국가들을 정복하여 고구려의 문화적 토양위에서 정복지의 문화와 조화시켜 풍부한 문화적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덧붙여 일찍이 국제화에 눈을 떠 여러 국가들과 대외교류를 활발히 추진하였다. 중원과 인도, 서역 국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불교, 법률, 관제 등의 도입과 더불어 음악문화와 악기를 들여왔다. 여러 문헌 기록과 고분벽화를 통해서 볼 때 고구려인들은 음악분야에서 우수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궁중에서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음악 연주와 춤, 무용, 놀이문화를 즐겼으며, 집단적 제천 의식과 제사의식, 심지어는 장례식에서도 북치고 음악을 하여 춤추며 죽은 이를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노래와 춤을 즐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고유한 음악적 배경과 외래적인 음악요소를 결합시켜 독창적인 고구려음악을 창조함으로써 당시 동아시아 음악사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독창적인 음악문화는 문헌에서도 고려기(高麗伎) 또는 고려악(高麗樂)으로 기록하고 있어 그 수준과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삼국의 음악과 더불어 고구려의 음악은 중원과 왜 등에 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어 당당히 그 나라의 궁정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고구려 초기의 음악은 여러 고분벽화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황해도 안악3호분(357년 축조)의 무덤 안에 주악도(奏樂圖)가 그려져 있는데 전실(前室)에는 입고(立鼓), 소(簫), 노래로 편성된 악대의 연주그림이 그려져 있고, 회랑(回廊)의 대행렬도에는 말을 탄 연주자가 북(鼓, 고), 소(簫), 각(角), 요(?)를 연주하는 그림이 있으며, 후실(後室)에는 현악기(거문고 혹은 쟁으로 추정), 완함(阮咸), 종적(縱笛)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는 그림이 남아 있다.


전실의 연주 그림은 한나라 때의 궁중 뜰에서 연주하던 황문고취(黃門鼓吹)이고, 후실의 춤추는 그림은 묘주인이 생전에 행하였던 잔치음악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며, 회랑의 대행렬도의 그림은 행진 음악의 하나인 단소요가(短簫歌)로 볼 수 있다. 이는 4세기 이전에 이미 중원의 한나라 음악이 고구려에 들어와 고구려의 전통악기와 더불어 연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사로는 고구려 제 2대 유리왕 3년(B.C. 17년)에 왕이 직접 지었다는 황조가(黃鳥歌)가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정확한 연대는 미상이나 황조가 외에도 내원성(來遠城), 연양(延陽), 명주(溟州) 등의 고구려 가요가 고려사(高麗史)에 그 이름이 전하고 있다.  


민간 음악은 거문고와 완함으로 연주하는 음악과 노래가 대표적이다. 춤무덤(무용총, 3-5세기 추정)에는 춤추고 노는 무용도와 함께 거문고, 대각(大角, 나발<喇叭>)을 연주하는 그림이 있다. 거문고는 4세기경 중국 진(, 266-420 / 동진(317∼420)으로 추정됨)나라에서 들어온 7현금(七玄琴)을 왕산악(王山岳, 생몰년 미상)이 개조한 악기이고, 현금(玄琴)이라고도 한다. 왕산악은 현금거문고를 제작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거문고 곡으로 100여 곡을 작곡하였으나 전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연주하는 현악기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은 거문고현금(玄琴)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거문고의 제작시기에 대한 기록이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의 기록대로 양원왕 때 제2국상으로 있던 왕산악이 552년에 7현금을 거문고로 개조하였다면 춤무덤에 나오는 거문고는 거문고라기 보다는 거문고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진나라에서 7현금이 도입되기 이전에 고구려에 이미 그 원형이 있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또한 거문고라는 명칭도 현학금에서 나온 것이 아닌 ‘고구려금’, 즉 ‘감고(가뭇고)’ 또는 ‘검고(거뭇고)’의 음변(音變)으로 보기도 한다. 거문고는 신라에 전해지기도 하였다.

 

거문고는 독주와 춤 반주 악기로 사용되었고, 완함은 춤 반주 악기로 쓰였으며 궁중의 잔치에서 춤출 때 반주하기도 하였다. 완함은 중원에서 도입된 악기이지만 고구려의 민간이나 궁중에서 두루 쓰인 것은 완함이 고구려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궁중에서도 궁중뜰에서 연주한 전정악(殿庭樂)과 왕의 행차, 군대의 행진 등의 쓰였던 음악이 한나라의 음악적 색채가 어느 정도 가미되었다 하더라도 그 만큼 고구려의 음악이 큰 나라의 체제에 걸맞는 의식과 음악을 갖추었고 융성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고구려는 4세기 후반 이후 국제체제를 더욱 정비하고 광개토태왕대 부터는 영토가 더욱 넓어지게 된다. 국력이 강해지자 대외 교류에 있어서도 중원대륙은 물론 서역과도 교역이 활발하였고, 인도와 서역계통의 음악문화가 전파되어 전성기의 태평성대에 걸맞는 융성한 음악문화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하여 나라가 커진 것 같이 음악과 춤, 놀이 문화 역시 다양성을 지녔다. 또한 이 시기는 고구려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음악적 토대 위에 중원과 서역을 통해 악기와 음악을 비롯한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전보다 더욱 풍부한 음악문화를 향유하게 되는 시기였다. 


장천1호 고분벽화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음악만 도입한 것이 아니라 춤추며 노는 장면을 비롯하여 공 던지기, 장대타기, 칼싸움, 장대 던지기와 말 위에서 놀이하는 것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서역의 악기와 놀이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씨름무덤(각저총)에는 소(簫)와 북의 그림과 함께 서역인과 씨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밖에 평양 부근의 여러 고분에는 놀이하는 모습들이 많이 그려져 있다. 고분벽화에 나오는 서역인들은 대개 고구려 귀족에 비해 비교적 작게 그려져 있고 하인이나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 등으로 묘사되어 있어 당시 고구려의 국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고구려 벽화에는 완함(阮咸), 각(角), 금(琴), 소(簫), 횡적(橫笛), 요고(腰鼓)가 그려져 있고, 중국의 문헌에는 오현(五絃), 금(琴), 쟁(箏), 피리, 횡취(橫吹), 소(簫), 북(鼓, 고)가 고구려 악기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음악에 사용된 악기는 각(角), 금(琴), 소(簫), 횡적(橫笛), 요고(腰鼓), 오현(五絃), 쟁(箏), 피리, 북(鼓, 고) 등인데 이 중에는 이전부터 연주되어 온 악기들이 대부분이지만 중원과 서역 등에서 도입된 새로운 악기도 있다.


   O 예전의 악기 - 완함(阮咸), 각(角), 금(琴, 거문고), 소(簫), 횡적(橫笛), 오현(五絃), 피리, 북(鼓, 고)

   O 새로운 악기 - 요고(腰鼓), 쟁(箏)

     * 새로운 악기 가운데 요고는 장고와 같이 허리가 잘룩하고 무릎위에 올려놓고 치는 북 종류로서 서역 계통의 악기이고 쟁(箏)은 중원의 악기이다.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기존의 음악적인 요소에 덧붙여 중국 음악과 서역 음악이 더욱 많아졌다. 이렇게 도입된 음악들은 고구려인의 음악적 특성에 맞게 고구려화 되었고 독창적인 음악으로 승화시켜 해외로 나가 연주될 만큼 훌륭한 위상과 보편성을 자랑하였다.


고구려는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에 보편적인 음악문화를 전해주었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그들의 궁중에서 여러 나라의 음악을 항상 연주하도록 음악인들을 상주시키는 제도가 있었는데, 수나라 개황(開皇 : 581년~600년)초에 7부기를 선정하여 궁중에서 연주하였으며 이 중의 하나가 고구려 음악이다. 수나라 대업(大業 : 605년~617년) 중에 7부기(七部伎)를 확대하여 9부기를 제정하였다.


    9부기에 편성된 고구려 악기

      O 관악기 : 적(笛), 생(笙), 소(簫), 소피리(소필률, 小筚篥), 도피피리(도피필률, 桃皮筚篥/복숭아껍질로 만든 피리), 패(贝, 조개/취주악기)

      O 현악기 : 탄쟁(弹筝), 와공후(卧箜篌), 수공후(竖箜篌), 비파(琵琶, 당비파를 말함), 오현(五絃, 후에 향비파라 부름)

      O 타악기 : 요고(腰鼓, 허리가 잘룩한 장구형 악기), 제고(齐鼓), 담고(擔鼓, 메는 북), 용두고(頭鼓), 철판(鐵板)

         * 9부기 중의 고구려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는 모두 14종류이다.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는 7세기 초 정관(貞觀: 627년~649년) 중에 10부기를 제정하였다. 십부기(十部伎)는 당나라 궁중 향연 때 행하는 연향악(宴享樂)이다. 


    10부기에 편성된 고구려 악기

     O 관악기 : 의취적(義嘴笛, 피리의 일종), 생(笙), 호로생(葫蘆笙), 소(簫), 소피리(소필률, 小筚篥), 도피피리(도피필률, 桃皮筚篥, 복숭아껍질로 만든 피리), 대피리, 패(貝)

     O 현악기 : 탄쟁(弹筝), 추쟁(搊箏), 봉수공후(凤首箜篌, 공후 끝에 봉의 머리를 장식한 것), 와공후(卧箜篌), 수공후(竖箜篌), 비파(琵琶, 당비파를 말함), 오현(五絃, 후에 향비파라 부름)

     O 타악기 : 요고(腰鼓, 허리가 잘룩한 장구형 악기), 제고(齐鼓), 담고(擔鼓, 메는 북), 용두고(頭鼓), 철판(鐵板)


10부기 중의 고구려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는 20종류이다. 수(隋)와 당(唐)나라 때 궁중에서 연주되던 7부기, 9부기, 10부기 중에 고구려 음악이 ‘고려기(高麗伎)’라는 이름으로 당당히 포함되어 있다. 중원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주변국들이 있었으나 7부기나 9부기 10부기에 제정되지 못한 것은 그 음악들이 궁중에서 연주할 만큼 수준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제와 신라 그리고 왜의 음악도 잡기(雜伎)로 취급되었음을 비추어 볼 때 고구려 음악이 중원 국가들과 견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문헌상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 후기와 말기에는 고구려의 악기와 중원과 서역 등에서 도입된 악기, 이들을 개량하여 고구려화된 악기들이 다양하게 연주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수나라와 당나라 궁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이유는 고구려에서 사용한 다양한 악기들이 고구려화되어 다른 지역의 음악과 구별되었고, 수준이 높았으며 다른 나라의 궁중에서 연주될 정도로 격식있는 음악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보다 먼저 중원 및 서역과 교류했던 나라로서 음악이 고대 한반도의 어느 나라에 견줄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중원과 서역에서 들여온 음악과 악기, 춤, 놀이들을 고구려화시켜 이전의 고구려 음악과 조화시켜 고구려 사람들에게 맞는 수준 높은 음악을 만들고 또 이러한 음악을 외국에 까지 수출하게 된 것이다.


고구려의 음악문화는 초기에는 주로 한나라의 음악문화를 도입하여 사용하였고 광개토태왕 이후 태평성대를 누리던 시기에는 중원과 서역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음악문화를 도입하여 재창조 하여 더욱 발전시켰다. 독창적이고도 고구려화된 음악문화는 수와 당의 궁중에서도 인정받을 만큼 우수한 음악문화를 자랑하였다.


고구려는 여러 나라의 음악문화를 폭 넓게 수용하고 특징적인 음악으로 승화시켜 당시 동아시아 인들이 공감하는 보편적이고 국제화된 음악문화를 이루어 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의 음악문화의 모태가 된다고도 볼 수 있다.  

                                          고구(려)기 [高麗伎]

중국 수(隋)나라의 개황(開皇:589∼600) 초에 제정된 7부기(七部伎)와 대업(大業:605∼617) 연간에 확대된 9부기에 포함되어 있는 고구려의 무악.


중국 문헌 《수서(隋書)》에 나오는 말로 수나라가 선정한 9나라 음악 중의 하나이다. 백제나 신라의 음악은 잡기에 들어 있 는데 반해 삼국 중 유일하게 고구려의 음악만 부기(部伎)에 속해 있다. 고려기에 사용되던 악기는 탄쟁(彈箏), 와공후(臥箜篌, 13현), 비파(琵琶), 오현(五絃), 적(笛), 소(簫), 생(笙), 소필률(小筚篥, 피리), 도피필률(桃皮筚篥, 피리), 요고(腰鼓, 장고의 일종), 제고(齊鼓), 담고(擔鼓, 메는북), 패(貝) 및 수공후(竪箜篌, 21현) 등 14종이고, 18명의 악사가 연주했다고 한다.


9부기 중 지금의 둔황지방에 있던 서량기(西凉伎)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황조가(黃鳥歌)

    4언 4구의 한역가(漢譯歌)

         翩 翩 黃 鳥  (편편황조) 펄펄 나는 저 꾀꼬리

         雌 雄 相 依  (자웅상의) 암수 서로 정다운데

         念 我 之 獨  (염아지독) 외로워라 이 내 몸은

         誰 其 與 歸  (수기여귀) 뉘와 함께 돌아갈꼬


고구려 제 2대 유리왕 3년(B.C. 17년)에 왕이 직접 지었다는 황조가는 가요로 우리나라의 현전 최고(最古) 서정시로 추정된다. 실연의 아픔을 꾀꼬리라는 자연물에 의탁하여 우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짤막한 한 편의 노래이지만 그 속에 왕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작가의 심경이 잘 표현되어 있다.


유리왕은 왕비 송씨(松氏)가 죽자 골천 사람의 딸 화희(禾姬)와 한인(漢人)의 딸 치희(雉姬) 두 여인을 계실(繼室)로 맞았는데, 이들은 늘 서로 쟁총(爭寵)하던 끝에 왕이 기산(箕山)에 사냥을 가 궁궐을 비운 틈에 화희가 치희를 모욕하여 한(漢)나라로 쫓아 버렸다. 왕이 사냥에서 돌아와 이 말을 듣고 곧 말을 달려 뒤를 쫓았으나 벌써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왕이 탄식하며 나무 밑에서 쉬는데, 짝을 지어 날아가는 황조(黃鳥:꾀꼬리)를 보고 감탄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

                    왕산악 [王山岳, 생몰년 미상, 550년 전후의 인물]

왕산악(王山岳)은 거문고의 제작자로 알려져 있으며 활동 연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동국통감(東國通鑑)』이나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양원왕 8년(552) 거문고를 만들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 후기에 활동한 인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중국 진(동진<東晉, 316∼419>으로 추정)나라에서 칠현금(七絃琴)이 들어왔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이를 연주할 줄 몰라 연주하는 자를 널리 구하여 상을 주었다. 552년(양원왕 8) 제2국상(國相)으로 있던 왕산악이 칠현금을 개조하여 새로운 현악기를 만들어 100여 곡을 지어 연주하였더니 검은학(玄鶴)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를 현학금(玄鶴琴)또는 현금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 악기가 오늘날의 거문고이다. 그가 거문고를 언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언급되어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357년(고국원왕 27) 축조된 안악3호분 벽화나 집안의 춤무덤(4-5세기가 정설이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3-4세기에 축조되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벽화로 미루어 볼 때, 4세기 무렵이거나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사진으로 보는 고구려의 음악문화  --> GO